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츠 구데리안 (문단 편집) === 히틀러와의 관계 === 구데리안은 기갑부대의 창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히틀러]]에게 충성심과 큰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구데리안은 그의 전차 개발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참담하게도 독일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 수상 이후로 병기국에 관심을 갖고 직접 방문한 통수권자는 [[히틀러]]가 처음이다." 자기 변호적으로 서술된 구데리안의 자서전에서조차 만슈타인이 자서전에서 히틀러를 신나게 씹어댄 것과 반대로, 히틀러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건조하고 객관적이다. 히틀러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더라도 건조하게 지적할뿐 비난하거나 하지 않으며 히틀러의 옳은 판단에 대해서는 그의 통찰력과 결단력에 대해 주저없이 칭찬한다. 저술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해보면 이는 엄청난 모험으로, 그는 적어도 히틀러에 대해 존경 혹은 연민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강력하게 추측된다. 사적으로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프로이센 원로 장성들조차 불편한 부탁은 구데리안을 통해 시킬 정도였다. 이들의 신뢰가 매우 강했다는 사실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그를 육군 참모총장으로 인선한 점에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이는 히틀러가 만슈타인과 같은 아부형 군인보다는 구데리안, 발터 모델, 귄터 폰 클루게 등 직언형 군인을 신뢰했다는 증언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모두가 똑같이 좋은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게 롬멜과 클루게는 히틀러 암살 모의사건 주동자들과 접촉점이 있었다는 이유로 수사선상에 올랐고 두 장성 모두 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개인적 감정과는 별개로 군사적 견해에 대해서 소신있게 말하며 히틀러와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1941년 겨울 태풍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구데리안이 해임되어 예비역으로 전환된 이유 또한 히틀러와의 강한 의견 충돌[* 소련군의 동계 공세를 저지할 방어선 문제]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